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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독서인생 (신봉철)

조글로 潮歌网 2020-09-16
  11시 발송



독서를 동반한 나의 인생(读书伴我人生旅程)


단군문학상리사회 사무실에서 저자 신봉철


나는 심심산골의 한 농촌소학교 교원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의 영향으로 나는 동년배 다른 어린이들보다 좀 더 일찍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또 독서에도 좀 더 일찍 취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6세 때 소학교에 입학하고 7-8세 때는 제법 과외독서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나의 독서력사도 이제는 50년이 넘는 셈이다. 그야말로 독서가 나의 전반생을 동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살 때 나는 첫 아동소설로 <대림과 소림(大林与小林)>을 읽었다. 그후 첫 외국작품은 <그처럼 살아야 한다>를 읽었다. 윁남의 영웅 “느구옌 반트로이”를 부각한 문학작품이다. 대략 중편에 해당했다.


9살 때 읽은 첫 장편소설은 <림해설원>이다. 그후로 고전소설 <수호전>을 대략 10세, 4학년 때 읽었다. 그때로부터 장장 50년을 책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 작품에 부각된 인물형상에 매료되고 아슬아슬한 정절에 매료되였으며 작품속에 내포된 풍부한 지식에 매료되고 아름다운 문자서술에 매료되였으며 좀 더 커서는 작가의 창작풍격에 깊이 매료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읽을 책은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 마을은 하도 ‘산이 높고 황제가 먼 고장’이여서 그나마 읽은만한 책들이 두루 널려있었고 또 우리 부모가 그 고장의 ‘훈장’이기에 읽을 책을 구해볼 수가 있었다. 


그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공부하던 외삼촌이 연길에서 책을 사서 보내주어 우리 마을에서 나는 ‘책부자’로 되였다. 문화대혁명 직전에는 독서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공동으로 “민간도서관”까지 꾸렸다. 도서래원은 적은데 독서에 흥취가 있는 학생들이 7-8명쯤 된다고 기억된다. 매개인이 자기 도서를 평등하게 10권 혹은 15권, 후에는 20-50권까지 내놓았다. 


도서의 소유권은 각자에 속하지만 일단 도서들을 한곳에 집중했다. 한 친구의 고방에 도서실을 꾸려놓고 내가 도서관리원을 담당하였다. 매개인이 가져온 도서들을 일일이 등기하고 또 빌려줄 때도 까근하게 등기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못보던 책을 교환하여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투어가며 책을 읽었다. 이런 호조형식의 도서실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전까지 견지해왔다. 


그때 우리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문화대혁명때문에 우리의 도서실은 무너지고 몇백권되는 책은 어느날 밤중에 가만히 각자가 집에 날라갔다. 그때 우리 나이는 10살도 안되였다. 지금도 나는 거의 2년을 견지해온 그 도서실이 무척 그립다.


1967년 7월, 나의 아버지가 우리 고향에서 근 70리 떨어진 한 공사소재지 중심학교에 전근되면서 우리 집은 이사해야 했다. 그곳에 가서 나는 한족반에서 학습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1년남짓이 언어문자 고생을 하였다. 왜냐하면 원래 내가 살던 고향마을은 60호 인가에 한족이란 딱 한호밖에 없었는데 그 집의 남녀로소는 우리 못지 않게 조선어를 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의 한어수준은 형편없었다. 한 1년이 지나서 나는 기본상 한족반의 학습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한면으로 조선어로 된 도서를 읽으면서 점차 중문도서와 접촉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인지라 읽을만한 도서는 기본상 얻기 어려웠다. 그래도 우리반에 몇몇 동창들이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破四旧)’할 때 용케도 ‘황색소설’들을 바치지 않았기에 우리는 절친한 동창들끼리 서로서로 빌려보았다. 

 

10세전까지 고향마을에서 지낸 그 시기가 나의 인생의 제1차 독서 전성기였다면 11세부터 15세사이는 제2차 독서전성기라고 할수 있다. 그 당시의 표준대로라면 그때 나는 인생에서 ‘황색소설’을 가장 많이 읽은 시기라고 할수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민족련합학교인 우리 학교에 독서를 아주 즐기고 문학창작을 하는 젊은 조선족 선생님이 배치되여 왔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우리보다 5,6세 이상이였다. 공동한 취미가 있는 우리들은 금방 선생님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였다. 


하루는 선생님이 우리들을 일여덟명 모아놓고 시험을 치르는것이였다. 시험내용인즉 매개 학생이 자신이 읽은 책 이름을 쓰는 것이였다. 책이름을 많이 쓸수록 성적이 높단다. 그때 나와 우리 반의 한족동급생이 책 이름을 300개 이상을 썼으며 우리는 최고점수를 맞았다. 


나는 그때까지 조선어로 된 도서가 절반이상을 차지하였다. 내가 그 당시 그토록 많은 책을 읽을수 있은 것은 첫째는 고향마을의 호조합작형 도서실 덕분이고 둘째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공부하던 나의 외삼촌의 덕분이다. 가난한 대학생이던 외삼촌은 어려운 경제여건에서도 독서를 즐기는 나에게 많은 도서를 공급해주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부활>, <하이네 시선>, <안나 까레니나>, <전쟁과 평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청년근위대> 등 외국작품들을 읽었으며 <삼국연의>, <홍기보>, <구양해의 노래>,<청춘의 노래>, <붉은 바위>,<폭풍취우> 등 중국고전, 현대작품들을 읽었다.


수십년간 꾸준히 독서를 견지해온 본문 저자


나의 독서 제 3차 전성기는 연변사범전과학교 조문학부를 다닐 때라고 할수 있다. 1974년에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에서 농사일을 몇해 하고 민영교원도 거의 2년 남짓이 하다가 연변사범전과학교 조문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몇년간 독서열이 좀 식었다가 학교에 와서 처음 도서관에 들어가보고 경이로움을 금치 못하였다. 학교 도서관의 몇십만권이나 되는 장서는 가히 나를 흡인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도서증을 아마 우리 학급에서 내가 가장 먼저 탔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의 책을 한권한권씩 빌려내다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평균 사흘에 한권 폭으로 나는 열독하였다. 


때로는 책을 교실에 가지고가서 수업시간에 몰래 읽군 했다. 2년도 안되는 시간에 20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당시 문화대혁명이후 우리는 첫기 대학생이라 보편적으로 학습열정이 높았다. 하여 도서관은 늘 자리가 없었다.


여태껏 도서관이나 서점이 없는 농촌에서 살다가 대학에 붙어 연길시에 오니 눈이 띄였다. 학교도서관은 물론 연변주 도서관, 연길시 도서관이 있고 신화서점도 여러개나 되였다. 그때부터 나는 얼마 안되는 매달매달 생활비에서 조금씩 떼내여 도서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독서습관, 책 사들이는 습관은 그때부터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집은 아버지의 매달 로임 51원50전으로 여섯식구가 생활해야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그해에 우리 남매중에서 삼남매가 동시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가문의 장자라고 매달 10원씩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두 녀동생에게는 매달 5원씩 보내주었다. 내가 매달 10원 가지고도 모자라는 형편에서 녀동생들은 5원을 가지고 매달매달 생활해나가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녀동생들에게 매우 미안하다.


나의 독서 제 4차 전성기는 장춘에 와서부터이다. 1995년말 나는 룡정시 당위서기로부터 길림성 로동청(지금의 길림성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청) 부청장으로 부임되여 왔다. 성에서의 사업은 출장이 많았다. 성내는 물론 성외에도 경상적으로 출장나갔다. 


그때로부터 출장 때면 다른 사람들은 출장지의 여러가지 물건을 사느라고 분주하지만 나는 공항에서 도서를 사고 출장지에 가서도 신화서점에 꼭 가보았으며 책을 꼭 사는 습관을 견지했다. 


 “지식은 곧 힘”이라는 명언이 있다. 나의 독서체험에 의하면 지식은 응용해야 힘이 된다. 젊어서 공청단사업을 할 때 나는 신문매체 통신원으로 어떤해는 거의 100여편의 보도기사를 발표하였다. 현 시 당위와 정부나 성정부기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사업연구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장기간 독서의 원인인지는 몰라도 나의 사업연구에 관한 글과 리론문장들은 론리성, 귀납성이 강하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하여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청에서 사업한 15년간에 나는 선후로 100여만자에 달하는 사업연구저작 <사색(思索)>, <탐색(探索)>, <모색(求索)> 을 출판하였다. 그외에도 연설문, 조사보고, 론문 등을 몇백편 발표하였다.


나의 독서 제5차 전성기는 길림공상학원에 와서부터이다. 2010년 10월에 나는 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로 부임되였다. 대학교는 지식분자들이 집중되여 있는 곳이다. 대학교 규률에 대해 나는 문외한이였다. 때문에 사업에 적응하자면 첫째는 책을 통하고 둘째는 실천을 통해야만 했다. 


나는 그때부터 대학교에 관한 도서들을 사들이고 읽기 시작했다. 5년남짓한 사이 나는 48권에 달하는 독서필기와 사업필기를 하였다. 대학교에 와서 사업한 이래 사업질서와 생활질서는 비교적 규률적이여서 계획적으로 독서할수 있고 계획적으로 글을 쓸수가 있었다. 


매주 적어도 1-2권의 무게있는 책을 읽을수 있고 매주 일요일마다 거의 꼭꼭 신화서점에 가서 책을 사들이군 했다. 길림공상학원에서 사업하는 5년남짓한 시기에 나는 직접 근 200만자에 달하는 연설자료의 95%이상을 집필하거나 상세한 제강을 짜야 시름놓군 했다. 


이 시기 나는 대학교 사생 대부분이 독서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놀랍게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적극적인 건의와 길림성 열독협회(阅读协会)의 지지하에 우리 학교는 전 성 대학교중 가장 먼저 열독협회를 설립하였으며 나 자신이 회장을 맡았다. 


그 당시 성정협부주석이며 성열독협회 회장인 조가치(赵家治)도 초청하여 전문강좌를 조직하였으며 열독 계렬활동을 조직하여 대학문화건설에 한갈래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룩하였다.


길림공상학원에서 사업하는 기간 새 캠퍼스 건설임무가 그토록 고달팠고 거의 밤을 지새우는 시간이 절반이상이 넘었지만 독서와 필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5년 남짓한 기간 나는 200여만자의 독서필기와 문장을 썼으며 선후하여 6권(도합 9권)의 저작을 출판하였다. 나의 인생길에서 독서의 과정이 없었으면 9권의 저작은 상상도 못할 것이며 그후 교수직함, 석사, 명예 박사 학력을 따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다.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제막식 및 문학사업좌담회


2016년 초 나는 정년퇴직한후 단군문학상리사회 리사장 직무를 맡고 있다. 단군문학상리사회 사업과 더불어 위챗방 “동인독서회”와 “천하위공(天下为公)” 등을 꾸렸다. 이는 우리 민족 문화를 고양하며 민족사회의 독서열을 불러일으키며 단군문학상의 이미지를 높이자는데 주요목적을 두고 있다. 


한편 매체와 합작하여 세계 장편소설 명작 100부를 선정하고 "길림신문"에 명작의 제목, 작가, 나라이름을 거재하였으며 작년 년말에 민족사회의 독서열을 일으킬데 대한 글도 발표하였다.


50여년의 독서생활, 이는 나의 인생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되여왔다. 나는 독서와 동반하여 성장해왔고 독서와 동반하여 지식을 쌓았으며 독서와 동반하여 사업능력이 제고되였다. 또한 독서를 동반하여 저서 몇권 펼쳐냈으며 독서와 동반하여 이제까지의 인생을 풍부히 하였다. 이제 남은 여생도 나는 독서와 계속 할 것이다.▣(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신봉철  편집/ 리호남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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